
나는 낡은 필름 카메라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빛바랜 가죽 냄새와 묵직한 금속의 감촉은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주말 오후, 나는 황학동 벼룩시장의 먼지 쌓인 좌판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물건을 발견했다. 1970년대에 생산된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 보이그랜더(Voigtländer) 카메라였다. 렌즈 캡은 분실되었고, 몸체 곳곳에는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왠지 모를 강한 끌림에 나는 홀린 듯 그것을 집어 들어 아주머니에게 거금을 드려 구매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능숙한 솜씨로 카메라를 분해하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필름실을 여는 순간, 예상치 못한 것이 들어 있었다.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필름 한 롤이 그대로 감겨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괜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떤 사진이 찍혀있을까?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다시 주인에게 돌려줘야할까? 일단 생각을 뒤로한채, 나는 조심스럽게 필름을 꺼내 암실로 향했다.
몇 시간 후, 축축한 인화지 위로 이미지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숨을 삼켰다. 사진들은 대부분 평범한 풍경이나 인물 사진이었다. 빛바랜 색감 속의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기도, 무심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마지막 몇 장의 사진이 문제였다.
첫 번째 사진은 어두운 숲 속을 찍은 것이었다. 초점은 흔들렸지만, 땅바닥에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다음 사진은 좀 더 가까이서 찍은 듯했다. 쓰러진 형체는 붉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었고, 부자연스럽게 뒤틀린 팔다리가 렌즈를 향하고 있었다. 불쾌한 사진을 보고 나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마지막 사진은 그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것이었다. 눈은 감겨 있었지만, 입가에는 마치 마지막 숨을 내뱉는 듯한 고통과 체념이 뒤섞인 표정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사진의 귀퉁이에는 찍은 날짜를 표시하는 듯한 '1979. 10. 27.'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단순한 사고 현장일까? 아니면... 살인?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카메라의 이전 주인은 누구였을까? 벼룩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던 아주머니의 가족이었을까? 왜 이 끔찍한 장면을 찍고 필름을 현상하지 않은 채 카메라를 판매하였을까?
그날 밤, 나는 많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여자의 공허한 모습이 떠오르는 듯했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 1979년 10월 말경의 실종 또는 살인 사건 기록을 찾아보았지만, 사진 속 여성과 일치하는 정보는 찾기 어려웠다.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묻혔을지도 모를 진실.
다음 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카메라 바닥의 가죽 일부가 살짝 들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틈을 벌리자, 그 안에는 아주 작게 접힌 메모지가 숨겨져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를 펼치자, 그곳에는 흐릿한 연필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붉은 메아리가 숲을 잠재울 때.’
붉은 메아리? 여자의 붉은 옷을 뜻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암호일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 메모는 누가, 왜 남긴 것일까? 카메라의 주인? 아니면 제삼자?
그때였다. 현관문 쪽에서 '달칵'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찾아올 사람도 없는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현관 쪽 소리에 집중했다. 아파트 복도 센서등이 켜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곧이어 집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삑, 삑, 삑... 누군가 잘못 누른 듯, 이내 소리는 멈췄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현관문 쪽을 엿보았다. 복도는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 제한. 망설이다 전화를 받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스산한 숨소리만이 수화기 너머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바로 문밖에서 숨죽이고 있는 누군가의 숨소리처럼.
"...여보세요?"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수화기 너머의 숨소리가 잠시 멎는가 싶더니, 이내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래된 녹음테이프를 재생하는 듯, 기계적인 음성이었다.
"그 카메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좋을 거야.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지만, 때로는 사람도 죽이거든."
뚜- 뚜- 뚜-
전화는 끊겼다. 나는 휴대폰을 쥔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오래된 카메라를 발견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수십 년간 잠들어 있던 끔찍한 비밀의 자물쇠를 건드린 것이었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카메라의 주인은 누구인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내가 카메라를 구매했고 내 번호와 어디 사는지도 알고있다.
창밖은 이미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책상 위에 낡은 카메라와 섬뜩한 사진들, 그리고 정체불명의 협박 전화 사이에서 숨 막히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문밖의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이 온몸을 옥죄어 왔다. 붉은 메아리는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할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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